봉건시대 (19세기중엽) 의 오다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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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도와 오다와라

애도시대의 두개 수도

당시 일본에는 쿄도와 애도 두개 수도가 있었다. 쿄도에는 정치세력이 없는 천왕이 있었고、애도에는 정치세력을 가진 도쿠가와장군이 있었고、이 두개 수도 사이에는 동해도가 있었다. 오다와라는 이 동해도 오십삼차숙장의 하나로서 잘 알려지고 있었다.




인구와 인구구성

오다와라는 사무라이의 마을이며, 성하마을 였다.

  일본 오다와라
애도시대의 인구 2,500~3,000만인 12,700인 (1850년)

사(승을 포함) 7% 40%
농(어를포함) 83~76% 8%
4~7% 14%
6~10% 38%

※사농공상 이지만、 농공상계급의 사이가 없었기에、무사와 농공상 두개의 계급이 당시사회에 존재했다고 볼수도 있다.

인구의 구성비


오다와라성

기원은 1200년부터 시작했다. 당시는 소규모의 산성 이였다. I5세기중엽 부터 일본은 흐트러져、이른바 전국시대로 됬다. 전국시대 일본에는 몇개인가의 정치세력이 생겼는데 、호조씨가 지배하는 오다와라가 그 세력중의 하나였다 .

호조씨는16세기에 두각을 나타내 이즈 및 관동지방에패를 주창했다. 결과 오다와라는 관동의 중심으로 되여、호조씨의 오다와라성은 대개수가 몇 번도 더해져、당시 일본의 제일 크고、제일 견고한 축성으로 됬다.

성 중심은 산구 우에 있고 、그 주위에는 저지의 호, 구릉의 공굴이 겹겹이 쌌여 있었다. 그리고 여기저기에 제방、벼랑이 무수하게 만들어졌다.거기에 동쪽의 바다、서쪽의 하코네산、남쪽의 하야천、북쪽의 사카와강이 오다와라의 성하정전체을 지키고 있었다.

우에스기 겐신、다케다 신겐의 공격에 견뎌(그때는 대개수전 이라고 전해지고 있다)、토요토미 히데요시의 공격(15만의 벽력으로、호조씨 벽력의3배)에100일이나 견뎌낸 겄으로보아 오다와라성의 견고함을 알수있다.

17세기에 들어서 애도에는 막부가 펼쳐져、오다와라성은 호조시대때의 중요성과 독립성을 잃고、애도 서방의 방비성의 역할을 하고있었다. 최후의 성주는 오오쿠보씨였다.

메이지 유신때 신정부의 명령으로 성이 파괴됬지만、이차대전후 주요한 건축은 재건 되였다. 애도 시대의 무사들의 자손들중 20%가 오다와라 및 그 주변에 지금도 생활하고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여인숙마을

에도 말기의 오다와라 숙소
에도 말기의 오다와라 숙소

17세기에 성은 중요성을 잃었지만、오다와라는 여인숙마을 로서、중요성을 가지게 되였다. 애도시대 쿄도-애도 간의 교통량이 급히 늘어나(참근 교대제도 이것에 박차를 가했다)、따라서 오다와라의 여인숙도 늘어 났다.

최성기로 생각되는 19세기중엽 약110건의여인숙、약30건의(추정)차점이 있어 동해도에서도 규모가 있는 여인숙마을 ・환락가로 되였다.



최성기의 여인숙마을
최성기의 여인숙마을

19세기말엽 일본은 서양문명의 섭취에 노력하고 있었다. 1889년 철도(동해도 본선)건설의 결과、동해도의 여인들은 걸어서 여행할 필요가 없게되여 여인숙마을도 존재의 이유를 잃었다. 지금 표시된(★)가 당시부터 영업을 게속해 왔던 장소였다.

文芸碑 歴史上のポイン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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